삼위일체 교리, 어떻게 발전했고 오늘날의 결론은 무엇인가?

삼위일체 교리 내용은 본디 그 내용에 이견들이 많았기에, 수차례 공의회를 통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결과 오늘날의 이론으로 정립이 되었다. 본 포스트에서는 삼위일체 교리 내용의 변천사를 다룬다.

삼위일체 교리 변천사

삼위일체 교리, 그 단어적 개념을 먼저 살피자면 한 분이신 하나님께 성부·성자·성령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다. 하지만 성부·성자·성령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아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은 성부이시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로부터 났다는 설명이 추가된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개념으로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 325년 니케아 공의회

주최 배경

삼위일체 교리 내용이 교회 전체의 화두가 된 것은 325년 5월 20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였다. 니케아 공의회의 주최자는 특이하게도 교회 내 지도자들이 아닌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다신교를 숭상하는 로마라는 나라를 하나로 묶어줄 시멘트로 기독교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이 기독교 안에서도 교리 문제로 갈등이 팽배하지 않은가? 이런 상태로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어려웠으므로, 로마의 안정을 위해 먼저 기독교를 안정시키기로 한 것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삼위일체 교리
325년 니케아 공의회

주요 쟁점: 성부와 성자의 관계

사실 니케아 공의회 이전까지 삼위일체 교리는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도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해석이 존재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역하던 사제 ‘아리우스’는 성자가 성부의 피조물이며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쉽게 정리하자면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데, 예수님도 하나님이면 다신교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을 ‘아리우스주의’라고 부른다. 아리우스주의는 무척이나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웠기에 급속히 로마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주장대로라면, 성자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이 잘못된 행위라는 이야기가 되므로 성자의 신성을 훼손시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용인할 수 없었던 사제 중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으니, 그가 바로 아타나시우스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 모두 하나님이시지만, 한 하나님께 두 개의 위격(persona)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 유일신 신앙에 어긋나지도 않고, 한 분께 두 인격이 있는 것이므로 성부 성자 모두 하나님이라 해도 모순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에 맞서 논쟁했던 사제, 아타나시우스

사람의 인격은 하나뿐이기에 좀처럼 납득이 안 가는 주장이지만 이러한 논리가 나온 데도 이유가 있다. 당시 논쟁의 근거로 사용되던 자료들은 사복음서 및 사도들의 편지서 즉 신약성경인데, 신약성경 안에서는 예수님을 그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한 부분도 있지만 하나님 자체인 것처럼 묘사한 부분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를 설복시키면서 동시에 성서적 모순에 빠지지 않을 묘수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한 개념이 바로, 오늘날 삼위일체 교리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의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단어 ‘위격(persona)’이다.

결과: 삼위일체 교리 우세승. 아리우스의 파문

좌우지간 이 회의를 주최한 건 콘스탄티누스였고, 그는 교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도 없었거니와 애당초 그런 데는 관심도 없었다. 한 달간 이어진 공의회 끝에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의 ‘우세승’을 판정했고, 이러한 내용을 담은 ‘니케아 신경’를 제정하여 공의회를 마쳤다. 아리우스파에서 제출한 신경은 파기되었다. 참석한 거의 모든 이들이 니케아 신경에 서명했으며 끝까지 서명을 거부한 아리우스 등 3인은 파문을 당했다.

니케아 신경이란?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를 담은 신앙 고백문으로, 아타나시우스파에서 작성 및 제출했다. 성부와 성자에 대한 믿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성자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담았다. 다만 이탤릭체로 작성된 ‘파문에 대한 경고’ 부분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비존재에서 생겨났다거나, 다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 또는 우시아(ousia)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었으며,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파문한다.

2.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주최 배경 1. 아리우스파의 역공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사실 삼위일체 교리 논쟁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앞서 서술했듯 아리우스주의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논리구조가 간단했고 위격 같은 어려운 개념 따위 몰라도 아무 문제 없었다. 더군다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아타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줬던 데는 어떤 교리적 이해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삼위일체 교리 논쟁의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았었던 셈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삼위일체 교리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에서 파문된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다시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그 배경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누이 콘스탄티아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채 콘스탄티누스의 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녀를 각별히 아꼈으므로 아리우스파가 그녀에게 접근한 것은 대단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결국 이복누이 콘스탄티아의 부탁으로 아리우스파의 주교들은 ‘회개증명서’를 제출하는 조건하에 다시 주교직을 되찾았다.

황실을 등에 업은 아리우스파는 급속히 그 위세를 회복했고 이제는 도리어 아타나시우스파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해 삼위일체 교리 확립을 주장했던 대표적 주교들이 거꾸로 이단이 되어 파문 및 추방 조치를 당하고 말았다. 특히 아타나시우스는 366년에 최종적으로 복권되기 전까지 다섯 번이나 추방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아타나시우스의 처우는 황제가 바뀔 때마다 달라졌는데, 대부분의 황제들이 이해하기 쉬운 아리우스주의를 통해 기독교를 이해했으니 아타나시우스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타나시우스는 366년에야 복권되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지내다 373년에 치열했던 삶을 마쳤다.

주최 배경 2. 테오도시우스 1세의 세례

아리우스도, 아타나시우스도 죽었지만 아리우스파도, 삼위일체 교리 내용도 계속해서 전승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 교리 간의 전쟁이 현재진행형임을 의미했다. 양보하지도, 양보할 수도 없는 전쟁의 마무리는 325년에도 그러했듯 황제가 담당했다.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는 379년에 즉위했지만 큰 병에 걸려 중태에 빠졌다. 세례를 미루는 관습에 따라 이제까지 세례식을 치르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몸 상태가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380년에 세례를 받는다. 어떤 작용에서인지 그는 이후 건강해졌고 굳건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암브로시우스에게 제지당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안토니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
암브로시우스에게 제지당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作

삼위일체 교리 논쟁과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는 황제의 세례 이야기를 왜 열거했을까? 사실 위 사건은 삼위일체 교리 논쟁의 판세를 뒤흔든 매우 중요한 기점이다. 이때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황제들 중 최초로, 아리우스파가 아닌 아타나시우스파의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아리우스파 대신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한 최초의 황제다. 그는 381년, 150여명의 주교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러모아 아리우스교리와 삼위일체 교리 간의 사생결단을 명했다. 325년에 이어 ‘제2차 교리대전(大戰)’이 열린 것이다.

결과: 삼위일체 교리 옹립. 아리우스파 이단 확정

황제가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고 있었으니 사실 이미 승패는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의견에 동조하는 수많은 주교들은 이전 황제들이 아리우스파를 믿을 때 그들의 주장이 옳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자들이었다. 애당초 325년과 같은 치열한 공방전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었다. 결론 도출부터 신경 채택까지 별다른 격론 없이 진행되었고 이로써 오늘날의 성부와 성자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두 공의회의 승패가 모두 황제의 손에 의해 결정된 탓에, 이후의 공의회들도 교리적 다툼보다는 누가 황제의 마음을 사느냐의 정치적 싸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3. 451년 칼케돈 공의회

그리고 그 정치적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최 배경: 다툼 또 다툼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가 열렸던 381년에 태어난 동방교회 대주교 중 한 명이었던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가 ‘인간으로서의 성자’를 잉태했을 뿐 ‘신을 낳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따랐던 자들을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부른다. 물론 네스토리우스가 이 이야기를 했던 것은 성자의 신성을 더욱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많은 주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교들은 네스토리우스파가 성자를 인간으로 격하시키려 한다고 분노했고, 이것이 논쟁의 도화선이 되어 431년 에베소 공의회로 이어졌다.

풀케리아의 초상화가 그려진 로마 금화. 그녀가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소유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또 외부 권력이 개입한다. 이번에는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이 풀케리아가 그 주인공이다.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2세 대신 8년간 섭정을 했고, 이후로도 굵직한 정치적 행보를 많이 남긴 황실의 세력가다. 좌우지간 네스토리우스파를 반대하던 키릴루스 주교는 그들을 견제하고자 풀케리아를 포섭했고, 그 권세를 힘입어서 네스토리우스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에베소 공의회를 열어 날치기로(?) 합의안을 통과시켜버린다. 네스토리우스는 이후 유배 생활을 거듭한 끝에 451년 사망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가 파문당한 원인이 이단적 교리를 주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요컨대 정치적 싸움의 희생양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파를 파문시켰던 키릴루스가 죽자 이번에는 유티케스가 등장했다. 유티케스는 키릴루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주장하는 바는 키릴루스와 다소 거리가 있었고, 그러한 주장은 동방교회 대주교에게 이단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키릴루스에게 배운 게 도둑질이었는지 유티케스도 황제를 포섭하여 449년 에베소에서 재차 공의회를 날치기로(?!) 개최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이단 취급하던 동방교회의 대주교를 오히려 파문시켜버렸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같은 동방교회에서 431년에는 네스토리우스가, 449년에는 다른 대주교가 완전히 반대의 사유로 이단 소리를 들으며 파문된 것이다. 이런 당나라 군대 같은 교계 상황을 정리하고자 교황이 나섰는데, 이것이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다. 날치기에 날치기가 더해져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정치적 촌극인 셈이다.

칼케돈 공의회, 삼위일체 교리
451년 칼케돈 공의회

결과: 교리의 승리인가, 권력의 승리인가

사실 교리적 쟁점이라 한다면 성자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인데, 좀 더 근본적인 면에 초점을 맞춰보면 교리의 다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상황 정리를 위해 나섰던 교황도 역시 황제를 찾아간 것이 그 방증이다. 교리야 어찌됐든 유키테스가 황제를 섭외했다면 칼케돈 공의회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네스토리우스파와 유티케스주의는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이미 공의회의 본래 목적은 크게 변질되고 말았다.

삼위일체 교리: 계속되는 논쟁

앞서 복잡한 공의회의 역사를 살펴본 이유는 오늘날 ‘정통’이라 명명된 삼위일체 교리 내용이 얼마큼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실제 삼위일체 교리 정립과 그리스도에 대한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칼케돈 공의회의 신경 내용을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 한 분이시고 같은 분께서 그리스도, 외아들, 주님이시며, 두 본성 안에서 혼합되지 않으시고 변화되지 않으시며 분리되지 않으시고 나뉘지 않으시는 분으로 인식되며, …

섞이지 않으면서 분리도 되지 않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는 ‘부정의 신학’이라 불리는 동방 신학의 특징이다. 무언가를 언어로 규정하는 순간 반론의 여지가 생기므로, 잘못된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부정의 표현’으로만 개념을 정하려 애쓴 것이다. 그러니까 기성교단에서 ‘정통’의 기준이 마련되었다고 자평하는 칼케돈 공의회에서조차, 명쾌하고 간결한 삼위일체 교리 설명에는 실패한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 여전한 의문
삼위일체 교리. 여전한 의문.

성부와 성자의 관계도 이처럼 명확하지 않은데 성령까지 포함되면 어떨까? 실제 오늘날의 교회들은 성자에 대한 견해에 따라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로 나뉘고, 성령에 대한 견해에 따라 또 여러 갈래로 나뉜다. 서로가 서로를 틀렸다고 정죄하지만 모든 교파에게 삼위일체 교리는 여전히 난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거치고,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리고, 잡히게 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대로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이사야 8:13~15, 베드로전서 2:6~8 참조).

삼위일체 교리, 더 이상의 변천사는 없다

삼위일체 교리, 그 확실한 답은 오직 삼위일체의 주인공이신 하나님께만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단 하나의 구절을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예수님이 계실 때에 존재했던 성경. 구약성경의 내용을 살펴야 한다. 구약성경의 예언과 신약성경의 성취를 짝지어본다면 예수님의 본질이 보일 것이다. 정치와 권력의 이해관계를 떠나 오직 성경만을 살펴보자. 그 중에서도 구약성경에 방점을 찍고 공부해 보자. 올바로 접근하기만 한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더 이상 난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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